[와이드스포츠(밀양)=최웅선 기자]비가 그친 하늘은 모처럼 가을을 만끽하기에 풍성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황금 들판을 지나고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서야 표충비각이다. 나지막한 산이 뭉게구름을 떠받친 모양새가 표충비의 신비로움을 더 한다.

표충비는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선 사명대사의 업적과 스승인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공적과 사적을 새긴 비각이다. 일명 ‘땀을 흘리는 비(한비 汗碑)’라고 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구슬땀을 흘린다.

문성남 밀양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밀양에 3대 신비가 있는데 표충비각이 그 중 하나”라며 “지금도 가끔 땀이 흐른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표충비가 처음 땀을 흘린 건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이라고 한다. 또 1919년 3.1운동과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광복한 날도 어김없이 땀을 흘렸다.

표충비각은 전통사찰인 홍제사 경내에 있다. 그 주변은 작지만 잘 꾸며진 공원이다.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삼비문(三卑門)’이라는 글귀가 눈에 띤다. 삼비문은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기허대사 등 세 개의 비문이라는 뜻이다.

중년의 여성이 노모와 함께 비각 앞에 섰다. 향을 꽂고 큰 절을 올린 뒤 정성스레 기도한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빌었을까?

비각 옆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고 바닥엔 때 이른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가을이 몸을 깊숙이 감싼다.

비각 아래 나지막한 둥근 향나무가 시선을 끈다.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나문데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을 향해 굽었다. 불제자로서 ‘도량(道場)’을 지키지 못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칼을 잡고 전장에 뛰어든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굴곡진 삶이 그랬을 것이다.

쪽문을 건너자 표충각 법당문이 활짝 열렸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대사 세 분의 영정이 벽면을 장식했다. 왼쪽엔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했다.

늦더위가 가을을 시샘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힌다. 서울에서 밀양까지 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큰 맘 먹지 않으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표충비각를 둘러보니 서너 시간을 운전해 온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진다.

최웅선 기자  wschoi@focusinas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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