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도 있었어요.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때 맞춰 마중까지 나왔어요. 저를 호텔 로비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는데......”

K씨는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가 하는 업종과 유사한 일을 하고 있고, 필리핀에 사업과 관련하여 계약을 맺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달라고 해서 출국 전에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L이 갑자기 생각난 듯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들어오실 때 면세점에서 물건을 사다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어요. 저야 잠시 공항 면세점에 들르면 되니까 당연히 OK했죠.”

양주 1병, 카메라 4개 등 제법 고가품이지만 그래도 험한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 사업 파트너에게 호감을 줄 수 있고, 돈이야 가서 건네 받으면 되니까 가르쳐 준 브랜드의 물건을 카드로 산 K씨.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공항 밖 사람들을 맞는 곳까지 가서 홈페이지에서 본 L씨를 만날 수 있었다. L씨는 그를 반갑게 맞으면서 짐을 들어주면서 차까지 안내해 주었다.

“타시죠”하면서 차에 K씨를 태운 L씨는, 잠자리 예약이 되어 있다면서 마닐라시의 한 호텔에 K씨를 데려갔다.

차창 밖으로는 이국적인 야자수 나무가 보이고 영어 간판을 단 건물들 사이로 음험한 골목길과 총을 든 안전요원들이 눈에 띄었다. 마닐라에 수 차례 왔어도 여전히 익숙지 않은 풍경들이었다.

로하스 불리바드에 있는 한 호텔에 도착한 L씨는 K씨에게 호텔이 관광객들로 붐비니 다른 호텔로 안내하겠다고 하였다. 정말 둘러보니 사람들로 가득 했다. 그리고 목이 마를 것 같다며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K씨는 L씨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다시금 차에 탔다. 이번에는 면세품을 포함한 짐을 아예 L씨의 차 트렁크에 실었다. L씨에 대한 믿음이 그의 의심의 눈꼬리를 완전히 내리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사업 계약을 맺으면 계약금이 떨어질 텐데 굳이 면세품 건에 대해 돈을 요구하기도 머쓱해서 가만히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다른 호텔 앞에 내린 뒤 호텔 소파에 K씨를 앉혀두고 L씨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아무리 기다려도 K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K씨는 L씨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뿔싸, 전화에서 울려 나오는 생소한 영어 소리. 전화기는 이미 꺼져 있었던 것이다.

면세품을 사는데 쓴 비용은 대략 300여 만원, 필리핀으로 오는데 든 왕복 비행기삯과 시간은 물론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K씨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또 어떠한가?

L씨처럼 면세품을 사서 필리핀으로 들어오게 한 뒤 공항에서 그를 반갑게 맞고 차에 물건을 싣자마자 훌쩍 떠나버리는 “면세품 대리구매 전문 사기 수법”. 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창안한 비상한 머리를 지닌 사기꾼은 1년이 가까운 지금도 이민국 수용소에서 추방을 기다리며 또 다른 기발한 사기 행각을 꿈꾸고 있고, “면세품 사 주실래요”하고 외는 그의 꼭두각시 문하생들은 오늘도 공항 근처를 서성이며 공항면세품 비닐봉지를 보면 눈빛을 번뜩이고 있다.

한편, 필리핀대사관에서는 면세품 구입 사기가 급증하고 있으며 사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면세품을 사달라고 하면 공손히 거절하고, 상대편에서 사업상 거래를 계속하기를 원하면 그때 가서 일반적인 상거래를 순서에 맞게 진행하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절대 면세품을 먼저 건네주지 말아야 하며 “사소한 것을 철저히 하는 것”에서부터 상거래의 신뢰가 쌓일 수 있다는 점을 상대편에게 미리 알린 뒤 영수증 액수만큼 대금을 지불 받고 건네주되, 신분 확인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상대편이 제풀에 그냥 사라져버리더라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대사관에 ‘인상착의’ 등을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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